임배우의 작업실

“10048282(음성메시지)”

학교 수업 중에 울린 삐삐의 음성메시지를 보고는 도통 수업에 집중하지못하고 빨리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린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공중전화로 달려가 음성사서함 번호와 비번을 누르고 음성메시지를 확인한다. 내용이라해봐야 안부인사를 비롯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이었지만, 이 별거아닌 내용이 그때는 왜그리도 궁금했덨지 수업시간 내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학창시절 추억의 한 단편으로 남아있다.


1982년 한국에 모토로라 삐삐가 처음으로 수입돼 들어올 때는 화면에 자신을 호출하는 전화번호가 표시됐다. 삐삐는 ‘단방향통신’이였지만, 그때 당시 무선통신 시대를 경험하게 해준 첫기기로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80년대를 대표했던 통신매체 무선호출기 ‘삐삐’의 인기는 중학생들에게 너무나 갖고 싶은 물건이였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엄마에게 조르고 졸라 간신히 얻게된 팬더모양의 오렌지색 삐삐. 그때의 그 감정을 들여다보면 소녀에게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랄까? 지우개만한 크기의 앙증맞은 기계 하나로 매일 학교공부는 뒷전이고 수업시간에는 울리지도 않는 삐삐를 선생님 눈을 피해 수시로 들여다보고 만지작 거리며 소녀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하니 말 다했지 뭔가.


휴대폰이 상용화되기 이전이니 삐삐는 우리들의 최점단 통신기기였다. ‘1004(천사)’, ‘7979(친구친구)’, ‘486(사랑해)’ 1010235(열열히 사모)’, ‘8282(빨리빨리)’ 등의 삐삐용 암호는 전혀 촌스럽지않게 급속도록 퍼져나갔다. 자신의 삐삐번호를 그냥 찍는경우도 있었지만, 오직 숫자만으로 내 마음을 표현해야하는 ‘삐삐용 암호’야 말로 친구들 사이에서 친밀감을 표현하기 위한 확실한 의사소통 방식이었다. 


나만의 삐삐가 생겼으니, 삐삐의 인사말 꾸미기에 돌입한다. 인사말에 좋아하는 노래를 직접 녹음한 아날로그 음악을 아날로그 방식으로 삐삐에 넣는 방법과 자신의 목소리로 인사말을 녹음해 넣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성친구를 위해 들려주고 싶은 고백노래를 녹음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나 또한 인사말을 만들기 위해 칼릴지브란 시의 한 문장을 응용하기도 하고 녹음된 나의 목소리가 맘에 안들어 지우고 녹음하고를 몇 번이고 반복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함에 웃음이 나면서도 순수한 마음이 느껴져 므훗한 엄마미소가 지어지는 건 그때의 순수함으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유치하면서도 순수함을 서로가 거리낌없이 받아줄 수 있었던 건 삐삐의 음성 메세지가 ‘일방적’이라는 사실에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 고민하며 몇번이고 반복하며 녹음하지만, 상대방은 ‘한참 후에’ 그리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내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야 급속도로 발전한 SNS(소셜네트워크시스템)로인해 즉각적이고, 쌍방향적인 대화가 가능하기에 단방향 통신 삐삐가 불편하다 생각될 수 있지만 때때로 삐삐가 그리운 건 상대방의 반응에 대해 신경쓰지않고 오롯이 나의 마음 그대로를 전할 수 있었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그 당시 우리들에게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원동력이 아니였을까? 누군가 ‘지금 즉시’가 아니라 언젠가는 나의 진심어린 목소리를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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