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은 나에게 기쁨이자 즐거움이 되는, 생각만 해도 좋은 한 가지를 담은 에세이 시리즈이다.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 이렇게 세 출판사가 함께 펴낸다. 우연히 알게되어 읽게된 몇 권의 아무튼 시리즈가 좋아서 그 첫번째 책 <아무튼, 피트니스>를 집어들기에 이르렀다.
여성, 중년, 비혼, 비만, 활동가...
그 삶에 피트니스가 일으킨 홀가분한 깨달음들
"무거운 걸 들어 올릴 땐 자기 한계를 느끼는 게 중요하다. 자기 힘의 최대치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면서도 더 했다간 무리일 것 같은 순간을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그러면ㅁ서도 더 했다간 무리일 것 같은 순간을 빠르게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겸허히 인정해야 한다. 무리하게 들려다간 바벨을 놓쳐 발등을 찍을 수도 허리가 나갈 수도 있다. 더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무리인 것 같기도 한, 그 애매한 짧은 순간에 자기 역량에 솔직해지는 것, 도전할 줄 알면서도 물러설 줄 아는 것! 아 지금 나는 도 닦는 연습하는 건가."
쉰이 될 무렵 여러 군데가 아프고 나서부터 운동(exercise)으로 피트니스를 시작했고, 그 무엇 때문에 하는 운동이 아니라 운동 그 자체, 운동이 일으킨 몸과 삶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즐기고 있는 류은숙 작가의 에세이.
나는 운동을 즐긴다. 라기보다는 운동에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경험해 보았다. 지금도 새로운 운동에 살짝 발을 걸쳐보는 걸 놓지않고 있기도 하고. 무언가 완성된 결과물에 닿을 때까지 진득하게 지속하는 힘이 부족하다라고 핑계를 대보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결국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아직은 몸이 덜 아파서 흥미는 잠시 접어두고 우선순위 뒤로 미뤄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마흔이 넘으니 나에게도 운동을 꾸준하게 해야만 하는 목적이 생겼다. 바로 당뇨라는 녀석. 무엇보다 꾸준하게 운동으로 내 몸을 관리하는게 중요하기에 오래 전에 읽고 책장에 꽂아두었었는데, 다시 집어들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본 것 (What I See)
□p.26 운동을 하고 살을 뺀다는 것이 외모에 대한 편견에서 도망치는 것인지 편견과 맞서 싸우는 것인지 자주 헷갈린다. 남의 눈에 들려고 하는 건지 나에게 나를 잘 보이기 위한 건지도 모르겠는 때가 많다. 하긴 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도 어차피 타인의 눈을 거치기 마련이다. '내 안에 너 있다'는 대사처럼 타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내 안에 존재한다. 나와 타자의 경계는 명확히 그을 수 없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 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자기답다'라고 한다.
□p.29 시간도 마찬가지다. 빈곤이 무엇인가를 헤아릴 때 삶에서 결여된 요소가 무엇인지 따질 목록은 길고, 그중 시간의 빈곤도 심각한 결핍에 해당한다.
□p.35 나는 트레드밀을 시속 3.5킬로미터로 걷는 달팽이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아무리 느려도 나는 움직이고 있다. 다시 움직인다는 것이 즐겁기만 했다. 분홍 신을 신고 무대에 오른 발레리나처럼, 운동화를 신고 나는 것 같았다. 나는 뭔가를 몸에 새긴 것이다. 몸에 새긴다! 이 말이 참 좋다.
□p.81 느리더라도 자기 속도록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묵묵히 갈 수 있다는 데 피트니스의 매력이 있다. "어리석은 자가 그 어리석음을 고집하다 보면 현명해진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말이다.
삶이 지루하다 해서 늘익사이팅한 경험을 만들고 매일 여행을 떠날 순 없지 않은가. 살아가려면 늘 고만고만한 일상과 맞물려 돌아가는 소소한 성취에서 기쁨을 찾을 줄 알아야 한다. 피트니스의 지루함은 삶의 그런 모습과 닮아 있다.
□p.89 나이 많다고 반말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건, 전통이 아니라 신분사회의 의식인 거다. 21세기 만민 평등에 기반한 공화국의 시민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체육관이건 어디서건 우린 동등한 시민으로 만나는 거다. 나이뿐만 아니라 하는 일, 일에서의 직위 같은 거를 따져 함부로 반말을 하는 건 타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는, 요새 하는 말로 적폐 중 하나다.
□p.100 어떤 동작을 할 때 말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그럴 때 먼저 체득한 사람이 시범을 보여준다. 나는 운동을 처음 배우면서 그동안 다른 일을 할 때도 그랬듯 운동에서 사용하는 용어, 영어 단어의 뜻 같은 데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책을 읽듯이 배우려 했다. 나도 가르치는 일을 많이 하다 보니 설명을 얼마나 조리 있게 하느냐에 더 집중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는 몸으로 체득한 앎을 존중해야 함을 깨달아갔다.
□p.109 맨스플레인은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라는 단어를 결합한 조어다. 남성이 여성은 기본적으로 뭔가 모르는 사람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말을 일방적으로 쏟아 붓는 태도를 말한다. 어느 날 스테퍼를 밟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로 손이 쑥 들어왔다. 기겁을 한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아저씨가 내 발을 강제로 미는 것이다. "발을 이렇게 놓고 해야지." ...
□p.110 짝이나 무리를 이루는 일에도 아주 상반된 성격이 있다. 무리 지어 운동기구를 차지하고는 잡담만 하면서도 비켜줄 생각은 안 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서로를 독려하고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운동에 집중하는 짝꿍들이 있다. 그런 단짝들은 타인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배려하고 있음이 눈에 보인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패거리의 일원이더라도 간혹 패거리 없이 혼자 있을 때 보면, 괜찮은 태도로 운동에 집중하는 걸 볼 수 있다. 홀로 있을 때건 무리 지어 있을 때건 일관되게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중요한 것 같다.
□p.121-p.122 무기력은 변덕스런 날씨처럼 고개를 치켜든다. 갑작스런 비처럼, 거짓말 같은 활짝 갬처럼, 기력과 기분은 시소를 탄다. 다른 일이 꼬였는데 운동만 잘 하는 건 불가능하다. 생활의 힘이 골고루 안배되어야 운동도 해나갈 수 있다.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 그것이 잘 사는 것 아니겠는가.
운동을 하면 피곤과 복잡한 감정을 다독일 체력이 길러지는 건 맞다. 운동만 따로 떼어놓고 말하면 백번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운동은 생활과 따로 놀지 않는다. 큰일과 작은 일, 중요한 일과 사소한 일의 흥정 속에서 부대끼다 보면 내 일상은 귀찮은 군식구 취급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운동은 일을 더 잘하기 위한 도구일 뿐처럼 여겨진다. 자기 관리 기술의 일종 혹은 문화자본 같은 게 되어버리면 운동은 일상의 벗이 아니라 하기 싫은 숙제처럼 느껴진다. 탄성을 잃은 고무줄처럼 뚝 끊어지기 쉽다. 고무줄처럼 너무 팽팽하게 당기고 사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일상의 안팎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도 무시하게된다. 느슨하게 풀어놓고 살아야 돌아보게 된다.
□p.123 돌본다는 뜻의 영어 단어 케어(care)에는 근심이란 뜻과 사랑이란 뜻 둘 다 담겨 있다. 근심일 때는 부담을 지는 것을 의미한다. 뭔가를 케어한다는 것은 관심이 많다는 관계를 표현하고 돌본다는 행동을 뜻한다. 제 몸을 잘 돌본다(I take good care of my self)는 말처럼 케어를 자신에게 쓸 때는 스스로에게 관심을 갖고 행동을 한다는 뜻이다.
□p.144 우리 몸은 아주 많이 다르다. 이 몸들 사이를 흘러다니는 다양한 감정과 행위가 우리의 사회적 건강을 이룬다. 신체와 마음의 근육을 늘리는 일은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 둘의 근력을 강화하고 유연성과 협력하는 능력을 늘리려면 (스포츠건 사회운동이건) 운동이 필요하다.
□p.151-p.153 내가 운동을 열심히 병행하는 삶을 살면 건강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렇다고 병이나 장애가 없을 것이라 확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느 쪽 길에 들어서건, 그 길마다 나름의 삶이 있을 것이다. 건강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temporarily able-bodied'라는 표현을 쓰자는 운동이 있다. 건강은 일시적인 것이므로 아픈 사람이나 장애인을 차별하지 말자는 뜻에서 제안된 말이다. 알리가 되든 스위처가 되든 자기 몫의 고유한 삶은 계속되는 것이다.
□p.152 '(몸으로 직접) 한 것은 이해하게 된다'는 말, 명언집 같은 데서 흔히 보이는 공자님 말씀이다. 그러나 이해의 방향성이 다르면 도취로 빠질 수 있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꼰대의 대표 어휘다. 이해한다(understand)는 것은 아래에(under) 선다(stand)는 말, 겸허해지는 게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일 테다. 나는 제대로 내 몸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모로 다짐을 해보곤 한다.
'운동을 해서 몸이 좀 좋아졌다고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또 다른 버전을 만들지 말자. 똑같은 산수로 서로 다른 생을 비교할 수 없다. 생애 주기에 따라서가 아니라 나에게 특화된 나의 몸과 활동이 있다. 늙지 않기를 바라는 대신 나이 듦과 더불어 살아가자. 운동은 하면서 '성공적인' 나이듦 같은 건 생각하지도 말자. 노화는 질병이 아니라 삶을 의미한다. 또 하나의 정신승리를 거부하자.'